1.
관리자로서 상사는 마음이 급합니다. 부하보다 봉급을 많이 받는 만큼 뭔가 보여줘야 합니다. 연말에 임원들과 마주칠 때면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립니다. 일상은 어떻습니까.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고 사람들에 시달립니다. 그러다보니 일과 중에는 자신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없습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일도 기억에 가물가물 합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무얼 할까'하는 생각은 사치일까요? 튀는 후배들을 볼 때면 자꾸만 정체되고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 서글픈데...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존중받지도 못합니다. 위기입니다.

일을 끌어 안는 게 주된 원인으로 보입니다. 일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믿고 맡길 부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일 잘한다던 부하들은 회사를 떠나거나 다른 부서로 옮겨갔습니다. 정성을 들였는데도 말입니다. 남은 부하들에게 기회를 줘봅니다만 결과는 항상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맡겨볼까 말까 고민하다 시간만 가고 '두번 하느니 내가 한번에 한다'는 생각이 이깁니다. 결국 일을 떠안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수나 수준미달로 다른 부서나 상관에게 책잡히지 않겠지요.

하지만 최종결과는 어떻습니까. 끌어안고 있던 일들 중에 공들여 제대로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감시간이 다가오고 중요한 일들 몇 가지가 펑크 날 상황입니다. 다급하고 아쉬워서 부하들을 불러 일을 시켜보지만 다들 어쩌면 그렇게도 한가한지 답답합니다. 핵심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내용만 채우고 있기 일쑤입니다. 차라리 안시키는게 나았을텐데... 후회가 됩니다. 최소한의 일만 하고는 모두 우루루 몰려나갑니다. 보나마나 커피자판기 앞에서 잡담을 할 것입니다. 물론 대화시간의 대부분은 내 욕을 하겠지요. 이런 벌써 밤 10시군요.

2.
스스로 떠맡은 일들이 점점 늘어나면 야근을 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집에 가져가서 해보기도 했는데 집에서 반응이 영 좋지 않아 그도 어렵습니다. 새벽에 남은 일을 정리하다가 서류에 코피가 툭 떨어집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무래도 일을 나눠야 겠어.

계획을 세워봅니다. 업무를 분류해 부하들에게 책임을 할당합니다. 다들 빈둥빈둥 거리니 거절할 명분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은 그나마 믿는 부하들에게 배정합니다. 이렇게만 해준다면 업무부담을 상당히 줄이고 체크업만 잘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부푼 기대를 갖고 회의를 소집합니다. '열심히' 취지를 설명하고 그리고 '자세히' 업무할당을 설명합니다. 혼자 떠들었지만 1시간을 넘겨 회의를 끝냅니다. 들리는 말로, 일을 끌어안고 나눠주질 않는다고 투덜댔다지요? 부하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 내내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한 명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회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맡은 일에 대해 다들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듣는 순간 어이가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불만이라니...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이번엔 일 안하려고 일 떼넘긴다고 나를 욕하는 걸꺼야.'

모두를 소집해 잔소리를 하는 것 보다는 한사람씩 일대일로 만나서 설명해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개별면담을 해봅니다. 들어보니 불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합니다. 실제로 당장 업무가 많아 추가로 일을 맡기에 어려운 부하부터, 떨어진 일이 현재 하는 일과 성격이 전혀 달라 다른 일을 원하는 부하까지... 하지만 회의시간에 이미 공식적으로 말한 사항이라 '상사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고 또 각자 입장을 다 들어주다보면 끝도 없는 셈이라, 밀어붙여 봅니다. 논리로 굴복시키는 것이지요. 설득이 시작되자 부하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마지못해 수긍을 하고 방을 나갑니다.

며칠 편하게 지냇습니다. 한가한 여유를 즐기면서도 마음 한 켠은 불안했지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바로 가져오라고 했으나 며칠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하나둘씩 문제를 들고 옵니다. "왜 이제야 들고오나?" 요즘은 책임감이 사라진 시대 같습니다. 일이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하는 부하들. 직접 챙기는 수박에 없습니다. 전원 야근을 지시하고 급한 불부터 꺼나갑니다. 돌아다니면서 진행상황을 일일이 체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할 줄 알았지. 이 부분은 완전히 틀렸으니 처음부터 다시 하게."

"이해가 이렇게 안되나? 대학은 제대로 나온거야? 고객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했잖나."

"순서가 틀렸잖아. 이걸 먼저하니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자, 잘보게 이렇게 하는거야."

급한 불을 끄고난 다음날, 마감시간이 남은 일들도 체크해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놀란 마음에 호통부터 치고 서둘러 지시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설명을 하고, 구두점까지 챙기고 나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잔업을 하는 부하들을 남겨놓고 퇴근하면서도 불안합니다. 그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건만 부하들의 눈동자는 왜 그리 흐리멍덩하던지...

어디 제대로된 인재 좀 없을까요? 왜 제 아래에는 문제인간들만 있는 것일까요?

3.
부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K실장입니다. K실장은 만나고 싶다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대신 자기가 시간을 정하는 편입니다. 자리로 가보면 책상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있고 차분히 상황판을 보고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반면 부하들은 일하랴 회의하랴 정신없습니다. 임원들은 K부장 부서를 모범부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정을 받다보니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K실장을 거쳐야 합니다. 일이 산더미 같을 텐데 이렇게 여유있는 삶은 어찌된 영문일까요.

대화를 나눠보면 조금은 색다른 느낌이 들긴 합니다. K실장은 말이 적습니다. 주로 듣는 편입니다. 그러다 한마디씩 거드는데 그럴 때면 내 생각을 잘 읽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내가 생각해도 설명이 미진했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짚어줍니다. 인상도 좋지만 대화를 마치고 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습니다.

K실장 밑에 있다가 프로젝트 팀장으로 승진발령 받은 후배와 한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배는 K실장의 팬입니다. 후배는 K실장의 장점을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탁월하냐고 물어봤습니다.

"K실장은 부하들을 믿습니다. 어떤 일이든 정답을 설정하지 않고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 설명부터 장황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합니다. 의견을 구하는 거죠. 부하들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게 되어 참석한 전원이 자연스럽게 핵심을 이해합니다. 부서가 핵심을 공유하고 있으니 누구에게 맡겨도 시행착오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논쟁거리가 있을 텐데 그럴 땐 부하들을 부드럽게 잘 설득하겠지?"

"설득하지 않고 일단 경청합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경청을 하면서 실무자의 생각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되면 그제서야 본인 생각을 꺼냅니다. 체크포인트만 간결하게. 그리고 또 경청합니다."

"질문하고 경청한다... 그 외 K실장이 부하를 따르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뭘까?"

"칭찬이죠. K실장은 야단치면서 가르치는게 아니라 칭찬하면서 가르칩니다.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은데 그러면서도 더욱 분발하게 되죠. 칭찬받지 않은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요."

"그렇군... 참, K실장은 일이 잘 되어 가는지 어떻게 챙기나? 자주 챙기면 부하들이 귀찮아 할 것이고, 안 챙기면 불안해서 참을 수 없을 텐데..."

"일단 맡긴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체크방법이 있죠."

"그게 뭔가?"

"그건 K실장에게 물어보십시오." 후배는 싱긋 웃기만 합니다

4.
자기 자신에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매우 우울한 경험입니다. K실장 부서가 잘 되고 내 부서가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상사인 나의 대화기술 때문이라니... 기술적인 부분이라 노력하면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참으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입니다. 지시만 기다리며 대충대충 일하고 뒤에서는 상사 욕만 하는 친구들과 결국 잘 해볼 수 있을까요?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사업을 하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하에게 존중받는 사람이 되어야 가족들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겠죠. 일의 홍수를 쓸어버리고 내 개인의 성장과 성공과 행복을 이루는 일... 내겐 정말 이룰 수 없는 꿈일까요?

K실장처럼 되고 싶습니다.


Posted by 기업인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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